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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년 산책] 14살 때 죽음 앞두고 올린 기도, 평생 지킨 '기도하는 삶'

1940년 무렵이었다. 내가 숭실중학 4학년을 끝내면서 평양 교육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평양에 하나뿐인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자중학교를 폐교했다. 민족주의 기독교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평양의 3숭(3崇) 폐교 사건으로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그 대안으로 일본인 학생이 다니는 학교를 제1 공립중학교, 한국 학생을 위한 평양고보를 제2 공립중학교, 숭실학교를 폐교한 대신 제3 공립중학교로 개편하면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함께 공부하게 했다. 기독교 민족주의 학생을 황국(皇國) 시민으로 개조하는 학교로 만들었다.   황국시민 양성에 몰두한 일제의 횡포     숭실학교에서 자란 우리를 1년 동안에 일본 국민으로 개조하려는 교육이 어떠했겠는가. 또 학생들이 받는 정신적 고통과 혼란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부모와 사랑으로 한마음이 된 어린애가 증오심에 가득 찬 계모 밑에 사는 1년이었다. 100명 정도의 4학년 학생을 반으로 축소했기에 퇴학당하는 학생 없이 졸업한 것이 다행이었다.   학교 교문 안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할 수 없었고, 민족주의와 기독교 사상도 금지했다. 나 같은 학생까지 교무실에 끌려가 모든 선생이 보는 앞에서 담임 선생에게 이유 없는 구타를 당했다. 기독교 가정 출신이고 기독학생회 간부로 있었던 이력 때문이다. 내 친구들과 함께 졸업을 못 하게 되는가를 걱정했다.   그 1년 동안 나는 일생에서 최악의 교육을 경험했다. 민족을 사랑하는 전통을, 침략국인 일본 국민으로 바꾸려는 정치교육이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고 정치적 인간개조의 수단이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인간교육이 정치 목적의 수단이었다. 있을 수 없는 교육이었다. 일본 본토 안에서도 그런 교육은 없었으니까.   25세에 북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정치적 안정기가 회복되면서 나 같은 자유주의 지성인은 할 일도 없지만 북 정권에서 본다면 최악의 성분과 반동분자에 속한다. 고향에 조용히 머물면서 주변 농촌 젊은이를 위해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목적으로 사립중학교를 설립했다. 뜻을 같이하는, 숭실학교에 함께 다녔던 대학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북한 정권의 특수층 세습 교육     그러나 교육환경이나 사회생활 여건으로 보아 공산정권은 일제강점기보다 더 심한 악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만 조용히 항일·친일을 떠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는 종교적 신앙까지 지킬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정권의 노예가 되는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우리가 뜻한 교육은 공산당원의 감시로 허용되지 않았다. 학생 일부는 민주청년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학교 운영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학교 이사장은 체포되어 수감됐고, 교장인 나도 신변 보장을 받을 수 없어 교육을 단념하고 탈북했다. 사립 교육 자체가 불법이었으니까.   그때 함께 고생하던 교사 전부가 서울에 와서 중고등학교 교사, 그리고 나중에 교장이 되었다. 공산정권은 자유주의자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어도, 종교인은 공산주의자가 되지 못한다고 단정했다. 소련·중공·북한에서는 종교가 사라졌고, 전통적인 종교 국가는 공산국가가 되지 않았다. 유럽과 미주만이 아니다. 인도와 중동도 그렇다. 사회주의까지는 되어도 종교는 공산국가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북한의 교육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교육다운 교육은 일제강점기 시대보다 더 불가능해졌다. 지금은 공산주의 교육보다 김일성 왕가를 위한 정신교육으로 퇴락했다.   해방을 맞은 뒤 1년이 되면서 우리 마을 북쪽에는 ‘유가족 학교’가 설립됐다. 공산주의와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당원들의 가족을 위한 특수학교다. 그 학교 출신이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로 진학해 공산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기반은 일찍부터 계획했다. 최고의 성분을 갖춘 미래의 지도자 양성의 특수학교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세습적으로 계승하는 특수층 교육기관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공산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나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다. 정치 목표와 이념이 절대적 신념과 같이 교육의 지상목표가 된다. 그곳에서 인간교육을 한다는 것은 빙판에 씨를 뿌리는 것 같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공산국가엔 인문학이 살 수 없어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러시아는 100년 동안에 문화 후진국으로 추락했다. 중국은 2500년 동안의 문화 정신적 전통과 유산을 버리고 아시아의 대표적인 공산국가가 되었다. 북한은 유례없는 인간 상실의 사회로 변했다.   대한민국이 교육의 자유 국가로 출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자유는 선택과 다양한 정신문화의 창조와 함께 이루어진다. 교육을 기반 배경으로 민족 이상이 가능해진다. 지난 70년간의 국가 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경제 10위권에 걸맞은 교육을 위해서는 개혁할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교육은 그 자체가 목적이지 정치나 경제의 수단 방법이 아니다. 사회 모든 분야의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계속되는 인간성 회복과 선한 사회질서 창출이다. 선한 인간성의 완성이 인간적 가치와 사회의 출발과 목표가 되어야 한다. 최선의 교육이 역사와 사회의 원천과 희망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북한 기도 평양 교육계 공립중학교 한국 기독학생회 간부

2023-11-10

[김형석의 100년 산책] 키 작아 걱정하던 외손주, ‘달리기 상장’ 받은 사연

9월 초순이었다. 교육정책과 방향 설정을 위한 교육방송 토론회에서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 KAIST 총장, 서울대 총장, 세 분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주제는 ‘교실이 바뀌어야 교육이 성공한다’였다. 다른 세 분은 모두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으나 나는 초·중고, 대학교육 모두를 경험했기에 사회자가 먼저 내 견해를 물었다. 나는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신념에서 초·중고 시절 경험담을 소개했다.   허약했던 손자, 지금은 심장내과 교수   40여 년 전, 미국에 사는 큰딸 집에 갔을 때였다. 외손주가 초등 4학년인데 키도 작고 볼품도 없는 편이었다. 며칠 전 학교에서 운동회가 있었다. 우리 애는 열심히 뛰었지만 언제나 꼴찌였다. 내 딸은 그러지 않아도 어려서부터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 담임선생과 상의하곤 했다. 운동회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애가 운동회에서 상장을 받아왔다. ‘누구보다도 제일 열심히 뛰었기 때문에 준 상’이었다. 꼴찌는 했지만, 열성만은 제일이었으니까 준 것이다. 그 애가 지금은 심장내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애가 초등학교 때 배운 것은 거짓 없는 정직, 욕하거나 어떤 폭력도 큰 잘못이라는 정신, 부족한 점 때문에 책망받는 것보다 적더라도 잘한 일에 칭찬받는 교육이었다. 학교장은 선생과 학부모가 합심해서 사랑이 있는 교육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큰 학교보다 규모가 작은 학교, 학생 수가 적을수록 사랑이 많은 교육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 가난했고 병약했던 나를 중학교에 가도록 부모와 의사를 설득해 주었던 윤태영 선생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   중고등학교에 있을 때였다. 고2를 지도할 당시 반 학생이 자살하려고 극약을 먹었다. 부모가 일찍 발견하여 병원에 입원시키고 위기를 넘겼을 때였다. 학생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찾아갔다.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못하고 깨어나는 중이었다. 내가 얼굴을 맞대고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퉁퉁 부어오른 눈을 뜨면서 나를 보는 모습이 “내가 죽었을 텐데, 우리 선생님이 아닌가?”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왔어.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라고 했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내가 진심으로 책망했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너를 목숨보다 귀하게 사랑하는 부모님이 계시고, 너를 위하고 사랑하는 나와 친구들이 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죽으려고 했어? 그렇게 네 멋대로 행동하는 법이 어디 있어?”라고. ○○군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너 이제 깨어나면 또 이런 짓을 할 테야…”라고 물었다. 울음을 그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선생님과의 약속이니까 믿어도 되겠다”라고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제자의 손을 꼭 잡고 함께 울었다. 그 제자가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광산학을 전공하고 미국 유타주 한 회사의 중책을 맡고 있다.   나는 교실에는 ‘사랑이 있는 대화’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모와 선생의 사랑을 믿을 수 있고, 미래를 약속하는 선한 친구들과 마음을 함께하는 대화,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경험을 연장해 가는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해진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내 소신은, 중고등학교 나이 기간에 친구와 이웃을 위하는 봉사 경험이 있는 학생은 군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불미스러운 행동은 물론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교 성적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찾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대화와 만남이 인생의 가치와 보람을 좌우한다.   자주 있는 일이다. 지방에 갔다가 제자들을 만난다. 한 고등학교 교사가 “대학에 있을 때는 열심히 공부도 하고 학점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 당시의 공부한 것은 다 잊어버렸다”라고 했다. 내가 “이상하다. 나는 대학 때 들은 강의와 공부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는데”라며 웃었다. 다른 제자가 “선생님은 기억력이 특출하셨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공부를 한 것이 아니고 학문을 했다. 그 당시에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까 기억한다”라고 답했다.     나는 대학교와 학문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문제의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공통된 문제의식 없이는 더 좋은 미래교육과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는 배출되지 못한다. 교수는 언제나 문제의식을 동반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학생들과 그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토론과 결론 탐구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   전공에 갇힌 한국의 대학 교육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학생들은 독서가 병행하지 못하고 모든 공부를 수능시험에 집중하기 때문에 학문과 사상의 주체가 되는 인문학적 사유의 결핍이 심각해지고 있다. 의사들도 환자를 대할 때는 과거와 달리 주치의가 동료 교수들과 종합진단을 통해 병상을 판단한 후에 다시 주치의가 책임을 진다. 교수들은 그런 초보적인 과정도 밟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독립된 한 과목, 자기 전공 분야에 집중해 학문의 다양성과 사회적 요청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인문학이 설 자리를 스스로 좁혀간다.   나 같은 경우는 독립된 철학과에서 강의하다가 역사학에도 관심을 두고, 문학 영역에도 참여해 ‘인문학적 사유’을 넓게 경험한 후에 다시 철학으로 복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철학적 사고가 인문학적 사유로 확장된 후에 다시 철학적 학문의 차원이 높아지곤 했다. 인문학보다 역사 문제와 사회과학은 그런 발전적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여러 가지 전문성과 융합성이 있는 현실에 대한 해결을 위한 대학 교실에는 문제의식이 필수적이다. 교실이 바뀌지 못하면 학문과 사회의 발전적 희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달리기 걱정 중고 대학교육 중고등학교 나이 인문학적 사유

2023-10-13

[김형석의 100년 산책] 연세대의 전설, 세 석두 교수 이야기

내가 70년 전에 연세대에 부임했을 때, 옛날 스승을 연상케 하는 세 석두(石頭) 교수 얘기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자타가 인정하는 철학과 정석해 교수였다. 다음 타자인 국어학자 김윤경 교수까지는 변함이 없었는데 세 번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이공대학장이었던 수학과 교수와 같은 대학에서 영어학을 가르친 심인곤 교수였다. 나는 심 교수가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는 편이다.   심 교수는 나와 가까이 살았고 같은 교회에서 봉사했기 때문에 유자격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걸음을 걸어도 앞 정면만 본다. 옆에서 누가 인사를 해도 눈동자만 돌려 볼 뿐 얼굴은 돌리지 않았다. 심 교수가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많지 않을 정도다. 그의 채플 시간 설교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표정과 모습은 돌비석처럼 빈틈이 없었다. 요즘 같으면 AI 강연 같았을 것이다.   대학 측에서 심 교수를 미국에 교환교수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그를 만나 본 미국대사관 헨더슨 문정관이 “17세기 신사를 본 것 같다”고 했을 정도다. 한번은 사모님께서 간곡하게 부탁한 적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저축 관련 얘기였다. 내가 “선생님 요사이는 인플레가 극심해서 적금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직도 봉급 일부를 은행에 저금하십니까”라고 했더니 심 교수가 “내가 학생들 보고 그렇게 해야 국가발전에 희망이 있다고 가르치고 딴짓을 하면 되겠어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퇴임 후에 낙향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심 교수를 ‘도사(道士)’로 대우했다.   김윤경 선생은 누구나 그의 성품을 잘 안다. 평생 한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분이다. 화를 내거나 누구를 비판이나 욕도 하지 않았다. 아호 그대로 ‘한결’같이 사셨다. 다 알려진 얘기가 있다. 한 운동선수가 김 교수의 교양국어 과락 때문에 한 학기를 더 다니게 되었다. 그 학생이 술에 취해 화풀이하러 김 교수 집을 찾아가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질렀다. 사모님이 당황해 선생에게 피신하라고 권했다. 대문을 열고 나선 김 교수가 “자네 ○○군 아닌가. 왜 그렇게 시험 답을 잘못 썼나. 내가 한 점만 더 주면 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찾아보았으나 안 되었어…”라면서 아쉬움과 나무람 섞인 걱정을 했다. 49점으로 과락한 것이다.   그 인자한 모습을 본 제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갔다. 나는 그분의 충고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가 세배를 드리고 “새해부터는 대외적인 강연이나 방송은 줄이고 학교 강의와 연구에 노력을 더 많이 하겠다”라고 했더니,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면서 “김 선생 내 간절한 부탁인데 학교 강의도 중요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줄이더라도 대외활동을 계속하세요. 내가 경험해 보니까 오래되지 않아 후배 교수들이 김 선생을 대신해 줄 겁니다. 아직은 우리가 후진 사회니까 필요해서 부탁해 오는 일은 계속하세요. 학생들도 중요하지만, 사회봉사는 필요한 시기와 인재가 있어야 합니다”라며 자기 일처럼 부탁했다.   잘못을 저지른 후배 교수나 학생들이 가장 무서워한 교수는 정석해 선생이다. 그런데 오래 사귀어 보면 그와 상반되는 성격이다. 책망하면서도 후배와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4·19가 지나고 4월 25일에 있었던 일이다. 정 교수가 주동이 되어 몇 대학의 원로 교수가 목숨 걸고 젊은 학생 200여 명의 희생에 보답하자는 교수 데모를 계획했다. 후배 교수들에게는 대학에서 대기하라고 연락하고 혜화동에 있는 서울대 교수회관에 뜻을 같이하는 교수들이 모이기로 했다. 그날 아침 정 교수는 가족들과 마지막 가정예배를 드리고 “혹시 내가 저녁때 집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각오하라”는 부탁을 하고 집을 나섰다. 정 교수는 “우리 늙은이가 먼저 희생되었어야 젊은 학생들이 살 수 있었는데…”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때 성사된 교수 데모가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종식’을 역사에 남겼다. 그런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몇 대학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연세대가 그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었다.   대학에서 다섯 교수가 예고 없이 해임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의 부당성을 지적, 항의한 주동자도 그 세 교수였다. 다섯 교수 해임을 철회하거나 교권의 보장을 확립하는 학원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다. 나는 늦게 세 교수와 대학 정책 시정을 요구하는 학원 내 농성에 동참했다. 그 당시 사태가 언론을 통해 대학가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데모 교수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총장서리였던 원일한 선생 집까지 찾아가 항의했다. 그 학생들은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구금 되었다. 농성교수단은 항의 농성을 끝내고 대학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부부싸움에 애들이 희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도 농성 교수의 한 사람으로 시련과 아픔을 모면할 수 없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학생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우리 교수들은 형무소 앞에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세 교수만큼 사욕과 사심 없이 대학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분들의 일제강점기를 통한 애국심은 역사에 남아있고 학생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교육자의 자세는 모범이 되었다. 나는 그분들의 신앙심도 높이 평가한다. 정석해 교수는 공산 치하에서도 신상 조사서 종교란에 ‘장로교 평신도’라고 명기했다. 대학에서 쫓겨나더라도 신앙인임을 자부하였다.   지금은 세 분 다 떠났다. 두 분 교수는 동상과 기념상을 학교에 남겼다. 정 교수는 우의동 4·19 묘역에 지팡이를 짚고 여러 차례 찾아가곤 하다가 아드님들이 사는 미국으로 가셨다. 내가 미국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렸을 때도 “한국에서 잠들고 싶다”라고 하셨다. 나라를 위해 제자들을 사랑하고 키웠던 스승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이야기 연세대 후배 교수들 교수 얘기 서울대 교수회관

2023-09-15

[김형석의 100년 산책] 120세도 바라보는 시대, 장수가 축복이 되려면…

100세가 넘으면서 가장 많이 받는 인사가 있다. “120세까지 사시라”는 축하 말이다.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맙다는 표정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내 가족 안에서는 그런 인사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104세인 지금도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여론조사 통계를 본 적이 있다. ‘100세까지 살고 싶으냐’는 물음에 한국 사람은 51%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일본인은 22%만이 그때까지 살고 싶다고 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인구가 많은 나라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100세 이상 인구는 9만 명이다. 우리보다 10배가 높은 셈이다.   한국과 일본, 100세를 보는 다른 눈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78%가 100세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100세 이상의 장수를 행복한 삶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왜 120세까지 살라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못 가졌을까.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세요”라는 인사라면 머리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라며 답례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 첫째 원인은 100 이상의 삶은 신체적 부담과 고통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어려움이 있다. 나도 95세 이후부터는 내 정신건강이 신체적으로 노쇠한 육신을 업고 다니는 부담을 느낀다. 저녁 10시가 되어 잠드는 시간에는 편안한 안식을 느낀다. 하루의 짐을 풀어놓는 가벼운 자세다. 반대로 아침 기상 시간이 되면 일어나는 것이 싫어진다. 내 몸이 천근만근 같아지면서 “30분만 더 자면 안 되나”라며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심정이다. 기상 자체가 주어진 부담이다.   이런 상황을 직접, 간접으로 경험해 보는 사람들은 “100세라는 산(山)을 넘어서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100세 이상 사는 가족이나 친지를 보는 사람은 그런 상태 이전까지의 인생을 원하게 된다. 정신이 신체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100세 이상까지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긴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소원이다. 오랜 기간의 행복이 인생의 목표다. 그보다 낮은 수이기는 하나 두 번째가 가족들의 성공과 행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것이 인간적 본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고 싶다는 기대도 있었다. 죽기 싫어서 산다는 대답도 있으나 20% 정도뿐이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마음으로 살아     100세까지 살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는 물음에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많았다. 그에 뒤따르는 것이 신체의 노쇠현상에서 오는 걱정, 경제적 불안감, 더 좋은 삶이 불가능하다는 예측, 평균수명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연사가 으뜸이다. 죽음에 따르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는 죽음의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다. 같은 희망의 반쯤은 가족들의 돌봄 속에서 조용히 가고 싶다는 기대였다. 평상시와 같이 잠들었다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깨어나지 않는 죽음은 복을 받은 편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어떠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90까지는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그런 희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막상 90이 되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라고 스스로 반문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는데 100세까지 연장되었다. 지금은 더 갈 수 있고 가야 할 인생의 길을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어 계속하고 있다. 평균수명과 건강나이가 10년은 더 연장된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100까지는 누구나 도전해도 좋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행복과 보람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누구나 의욕과 희망을 품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100세가 되었다고 스스로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120세까지도 연장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구한 말에는 왕실에서 80세 장수한 노인을 찾아 지팡이를 선물했다. 20년이 연장되어 나는 100세에 청와대에서 주는 지팡이를 받았다. 지금 20~30대의 젊은이들은 20년쯤 더 연장될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은 아니다. 자연인의 한계를 넘어 삶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다. 자연의 한계를 넘어 정신적 문화에 동참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니까. 인간은 시간 안에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사회와 더불어 창조해 가게 되어 있다.   역사를 누가 이끌어 왔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 최선의 삶을 영위해 준 사람들이다. 이에 뒤따르는 또 하나의 삶의 창조적 영역이 있다. 내가 사는 공동체 의무를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나와 더불어 가족을, 우리와 함께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삶이 본연의 책임이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력과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주어지는 일과 사명 의식을 갖추고 산다면 100세라는 시간적 한계는 사라지게 된다. 나이란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진실이 된다. 나 같은 늙은이도 주어진 일이 있는 동안은 책임져야 한다는 의지로 삶을 계속하고 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장수 축복 정신적 가치 시간적 한계 여론조사 통계

2023-09-01

[김형석의 100년 산책] 6·25 때 잊지 못할 제자, 포로수용소에서 보내온 성경책

 6·25 전쟁이 중반을 넘어설 때였다. 몇 달 전에 나를 찾아왔던 두 군인 제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이군의 색다른 편지를 건네주었다. 제자들과 학생 때 겪었던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남기고 간 큼직한 사무용 봉투를 뜯었다. 담배 냄새가 강하게 풍겼는데, 그 속에 이군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또 그가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는 성경책도 있었다. 이군의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선생님 감시·체포하라” 명령에 불복   “6월 25일 전쟁이 보도되면서 선생님과 마지막 헤어질 때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만나기 어렵게 떠나는 우리 학생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는 눈물 머금은 기도입니다. 저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성경 공부보다는 선생님을 감시·보고하는 책임으로 참석하곤 했습니다. 2주쯤 지났을 때입니다. K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선생님을 감시하다가 10일 이내로 체포해 오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신촌에 있는 집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두 번째는 이화여대 김종필 목사 사모님의 얘기를 통해 선생님은 피란을 떠났고 가족들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같은 명령이 계속될 것 같아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습니다. 전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거제도 수용소에 있을 때 수용소 외곽을 감시하는 국군 중에 이 편지를 전하는 중앙학교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후에는 또 한 친구를 만나 선생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생각으로 고민하다가 귀순하고 국군으로 편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 차례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허락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위한 충성스러운 군인과 국민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선생님 옛날과 같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수용소에서 읽던 성경책을 동봉했습니다.”   나는 나중에 이군이 진해 부근 국군 부대에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휴전과 더불어 나는 부산 중앙학교 분교를 정리하고 서울 본교로 복귀했다. 경찰 정보 관계 사람이 찾아왔다. 그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함경도 출신인 엄진기 선생과 나, 교련 장교로 있던 정 대위와 송 중위는 A급 반공 분자여서 체포·처형 대상이 되어 있었다.   B급 1번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의 사위인 김상을 선생이었다. 중앙학교 좌파 책임자 남로당원은 지리 선생인데, 정치적 발언은 별로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엄 선생은 좌파 학생들에 의해 체포되어 세상을 떠났다. 엄 선생의 두 아드님은 그 후 미국에서 한국 방송국 지사장을 하면서 반공 운동에 앞장섰다. 송 중위는 피신해 있다가 좌파 학생들에게 잡혀가 삼청동 숲속에서 피살되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   정 대위는 나와 같이 피란을 갔다. 정보기관 경찰은 나머지 반역을 한 선생들의 신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세상이 바뀌면 선생님만 불행해질 텐데 학생들에게 반공 얘기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걱정해 주었던 박 선생은 후에 경희대 교수가 되었다. “3개월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내 생각을 많이 했다”라는 불문과 선생은 “때가 오면 자결하려고 청산가리 독약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했다. 후에 고려대 교수가 되었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들은 북한의 실정을 체험했다는 고백이었다. 좌파는 아니지만 성격이 과격했던 선생들이 앞장서 활동하다가 북으로 간 선생도 있었다.   다른 얘기다. 내가 오래 친분을 갖고 지낸 김여순 중고등학교 교장이 있다. 아끼는 제자가 좌파 선생의 지령을 받고 지내다가 경찰에서 조사받게 되었다. 김 교장이 직접 신분 보증을 서고 계속 사랑으로 키웠다.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6·25가 터지자 제자가 찾아와 제가 끝까지 보호해 드릴 테니까 집에만 계시라고 부탁했다. 어떤 날 잠시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제자가 집으로 들어가고 두 사람이 집 앞에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피신했다. 후에 알아보니까 그 제자가 사복을 한 보안서원을 동반하고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김 교장은 모든 사람과 제자는 믿을 수 있어도 공산주의자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서슴지 않았다.   북한 탈출한 황장엽씨의 고백   내가 1962년 유럽에 갔을 때는 공산당원을 자처하면서 선전하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1972년에 갔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는 지성인들을 자주 만났다. 20세기 말에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사람은 진실과 인간애를 포기하면서 공산주의를 신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도 마찬가지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6·25 전쟁을 체험한 나와 같은 세대도 자유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다. 북한에서 공산 치하를 살아 본 사람들은 같은 정치적 과정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격의 가치를 염원하게 되면, 반공적 사명을 포기하지 못한다. 북한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받던 황장엽씨도 인생 말년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했다.   그가 나에게 남겨 준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 보지 못했습니다. 북한 동포와 굶주리고 있는 어린애들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희생시켜도 아깝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인간다운 삶이 사라진 지 오래됩니다”라는 고백이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포로수용소 성경책 선생님 감시 선생님 소식 엄진기 선생

2023-08-18

[김형석의 100년 산책] 100년 시간에서 배운 것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언젠가 캐나다에 갔을 때였다. 친분이 두터운 전 선생이 자기 동생 얘기를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의 동생이 캐나다에 이민 왔을 무렵이었다. 캐나다에서는 기술자가 되어야 직장도 쉬 구할 수 있고 빠른 기간에 정착할 수 있다. 내가 친구인 캐나다 사장에게 취업을 부탁했다. 그리 크지 않은 자동차 정비 공장이었다. 전 선생 아우에겐 “처음에는 기술습득 기간이 있고 적당한 때에 정식직원으로 대우해 줄 것이니 최선을 다해 보라”고 당부했다.   캐나다 정비공장서 인정받은 청년   형의 소개를 받아 직장을 찾은 전군은 6개월 정도 훈련을 쌓고 계약직이 되기로 약속받았다. 그는 취업 10여일 후부터 다른 동료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청소와 작업 준비를 하고, 퇴근 후에도 한 시간씩 남아 잔업을 정리했다. 6개월 후에는 유급 직원이 되었다. 그래도 하루 2시간씩 계속 남아 일했다. 주인에게는 영어도 부족하고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그대로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주인이 전군에게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내가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을 하나 주겠다”라고 했다. 전군은 작업복이나 한 벌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주인이 타던 자동차를 넘겨주겠다고 했다. 전군은 그렇게 큰 선물은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주인은 캐나다에서는 선물을 거절하는 일은 없으니까 받으라고 했다. 형과 상의한 전군이 주인에게 “나는 아직 그렇게 좋은 차를 탈 수 없으니까 그간 다닌 교회 목사님에게 그 차를 드리고, 목사님의 작은 차와 바꿔도 괜찮겠냐”며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해서 정규기술자 대우도 받게 되었다.   전군 형의 얘기다. 얼마 전에 그 사장이 찾아와 “작은 정비소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당신이 반(半) 투자하고 동생에게 실무를 맡기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해 왔다는 것이다. 그 사장은 캐나다 직원보다 전군의 마음씨와 성실한 노력을 믿은 것이다.   나는 요사이 기업체나 회사의 초청을 받아도 전군 경우 같은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1970년대까지는 내 얘기가 받아들여졌으나, 노조 운동이 정착되면서 이제는 낡아 빠진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전군 얘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다. 영국 연방국가인 캐나다는 가장 먼저 노조 운동이 일어난 나라다. 심한 노사갈등도 겪었다. 그럼에도 노조 측에서 보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전군 같은 얘기가 통한다. 또 국민 다수가 이를 인정한다. 예컨대 영국·캐나다는 물론 많은 국가가 영국 대처 총리의 노조개혁이 영국 경제를 다시 일으켰다고 부러워한다. 30년쯤 지나면 우리도 전군과 같은 사례를 수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노동운동도 국가를 생각해야   우리나라에 노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때였다. 내 제자인 박영식 교수가 연세대 총장이 되었다. 새로 뽑힌 노조 조합장이 150개가 넘는 요청사항을 들고 왔다. 박 총장의 고백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 “나 이 요구사항을 다 검토할 시간이 없으니까, 전국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는 대학의 사례를 알려주면 그보다 더 잘해주겠다”라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거짓말같이 들릴 것이다. 이화여대에서도 신생 노동조합의 요청이 110여 개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민노총의 핵심 조합원은 삼성 본사에 진입해 노조 설립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런 노동운동이 절정에 이른 것은 문재인 정부 때였을 것 같다. 문 정권의 두 세력이 민주노총과 전교조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우리는 노조 활동을 거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 운동이 있어 과거의 잘못이 비판받고 개선되며 역사적 발전도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이 함께 믿고 따라야 할 규범도 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빌린다면 ‘선의의 공동체 의식’이다. 윤리적 가치이며 정의로운 방법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와 같은 정치적 목적과 이념을 위한 경제 규범이나 노동운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 전체의 목적과 방향을 배제한 정권 운동이나 노조가 소속된 조직체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허용될 수 있다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노사의 조화로운 협력이 필요하다. 국가 경제를 육성·발전시키는 의무마저 포기할 권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노조도 사회의 부분 조직이다. 전체 국민을 위한 협력체다. 국가 전체나 윤리 가치에 위배되는 행위는 곤란하다. 자칫 정신적 질서파괴까지 연결될 수 없다.   일의 다양성이 사회발전의 원천   따져보면 노동자 아닌 국민은 없다. 일의 다양성이 사회진보의 원천이고 원동력이다. 일의 가치는 개인이나 이해집단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회가 평가 규정한다. 내가 하는 신체적 일이 노동이고, 정신적 가치와 문화 운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최저임금이나 근무시간 규정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우선이다. 삶의 가치는 임금이나 시간의 길고 짧음에 달려 있지 않다. 모두가 스스로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추구하고 서로 공존하면서 협력하는 것이 최선의 의무이며 방법이다.   나도 100년의 인생을 살아보았다.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린다. 애사심을 요청하는 게 아니다. 내가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로서의 직장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원칙을 저버려선 안 된다. 이기적인 삶은 불행을 자초하며 폐쇄적인 이기집단은 사회적 불행을 더해 줄 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시간 사랑 캐나다 정비공장 전군 얘기 캐나다 사장

2023-07-21

[김형석의 100년 산책] 나는 100세 넘었어도 외롭지 않다

부부가 함께, 그리고 오래 살아가는 백년해로(百年偕老)는 복 중의 복이다. 누구나 경험하는 사실이다. 해로하지 못한다면 누가 먼저 가는 것이 좋을까. 일률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흔히 남자가 먼저 가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늙은 남자가 혼자 추하게 남는 것보다, 여자가 자녀들도 함께 있기를 원하고 가족애도 강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부인이 남편에게 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을 먼저 보내드릴게. 김 교수님이 혼자 쓸쓸히 고생하는 것을 보니까, 사모님이 선생님을 혼자 남겨두고 가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라는 것이다.   20년 전 먼저 간 아내 항상 생각   반대인 경우도 있다. 내 친구 김태길, 안병욱 교수는 아내보다 먼저 갔다. 두 부인은 연하이고 건강했는데, 남편들이 작고한 뒤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안 교수 부인이 예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기에 만일 안 선생 부인이 먼저 갔다면 안 선생은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경우도 생각해 본다. 아내를 먼저 보낸 지 20년이 되었다. 아내 생각은 언제나 떠오른다. 아들·딸이나 손주들이 모이면 자연히 어머니와 할머니 얘기를 한다.   대답은 간단한 것 같다. 사랑할 상대가 사라졌을 때 누구나 고독해진다. 다시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졌을 때 고독은 절망이 된다. 절망은 정신적 종말, 죽음과 연결된다. 그런 고독은 남녀의 구별도 없고, 나이의 차이도 없다. 고독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99의 악조건이 있다고 해도 사랑의 연결이 하나라도 있으면 고독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90이 되면서 더 외로움을 느꼈다. 100세가 넘으니까 혼자 있어서는 안 되고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해진다. 그것이 고령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짐이다. 그래도 나는 그 고독을 극복해냈다고 생각한다.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일을 위하고 사랑하는 열정이었다.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 그 일에서 오는 위로와 보람이 고독한 심정과 시간의 공간을 채워주었다. 그 일은 보수나 소유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학자로서 진실을 찾는 의무였고 제자들을 위하고 사랑하는 즐거움이었다. 대학을 떠난 후에는 친구들과 사회에 무엇인가 남겨주고 싶은 사명감 비슷한 것이었다. 일 많은 나라에 태어난 것에 감사했고, 많은 일이 주어지는 현실에서 보람을 느꼈다. 가족들을 위하는 책임도 있었으나,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있을 때는 교육계를 위하는 책임이 항상 뒤따랐다. 무거운 짐이었으나 나름대로 사랑과 보람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90을 넘기고도 지금까지 주어진 일에 매달려 산다.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이켜본다. 80까지는 내가 일을 찾았으나 그 후에는 사회가 나에게 일을 맡겨 주었다. 일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늙으면 인생의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노년기 인생을 위해 스스로 일하는 열성을 가지며, 정부와 사회가 노년기까지 일할 수 있는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수록 필요한 또 한 가지 과제는 인간관계를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넓혀가는 일이다. 인생은 어떤 인간관계와 공동체 의식을 갖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노년기가 힘들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좁아지며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즐거운 인간관계를 누리다가 늙으면서 더 넓혀가는 사람이 있고, 점차 좁아지고, 상실해 가기도 한다. 가족관계까지도 유지하지 못해 고독해지는 노인들이 생긴다. 그 책임의 반은 내게 있고, 반은 자립심을 상실한 노약자를 위한 정부와 사회의 도움 부족일 수도 있다.   옛날에는 노인정 같은 휴게시설이 있었다. 최근에는 경로 시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인생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 각자의 책임이다. 종교단체를 비롯한 교양과 정신적 안정을 위한 기관과 시설도 있다. 노년기에 찾아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애를 주고받음에서 출발하고 열매를 맺는다.   요즘 시대의 장년기는 30~80세   지금 30대와 나의 30대를 비교하면 사회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청년기와 노년 기간이 짧아지고 장년 기간이 일생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일하고 성장하며 인격을 키워가는 장년기는 30에서 80까지 차지한다. 평균수명도 길어졌고 건강수명도 높아졌다. 모두가 풍부한 정신적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선각자나 선구자는 되지 못해도 그런 사회에 적응하는 노력은 필수이다.   생활영역과 공간도 예상했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 변화와 발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노령화를 앞당겨서는 안 된다. 나의 세대에서는 60을 노년기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도 80까지는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장년기가 길어졌다는 것은 젊게 성장하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더 좋은 세상을 자율적으로 창조해 가는 것이 주어진 과제이고 희망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남녀노소 인간관계 노년기 인생 아내 생각 선생 부인

2023-07-07

[김형석의 100년 산책] 절대 ‘꼰대 할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꼰대’라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예전에 나이 든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하면서 E군의 조부 얘기를 소개했을 때였다.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손자 결혼에 반대한 할아버지   E군은 대학을 끝내고 군에 입대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약속했다. 자기가 군에서 제대하고 여친도 대학을 졸업하면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결혼하기로 했다. 그 뜻이 이루어져 두 젊은이는 인생의 아름답고 행복한 꿈을 간직하게 되었다. 남은 문제는 E군 할아버지의 허락이었다. 할아버지는 E군이 장손이고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두 가지 문제만 없으면 결혼하라고 했다. 우선 사주가 좋아야 하고, 또 우리 가문을 위해서라도 상대방이 천민 직업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사주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상대방 집안도 명문가인데 양가 선조들이 한양에 살았을 때 서로 원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놈의 집안과는 혼인을 맺을 수 없다. E군 증조할아버지가 유언까지 남겼다는 것이다. 그런 사태에 직면한 E군 부친은 고민에 빠졌다. 생각 끝에 E군 여친 아버지를 찾아가 양해를 얻었다. 할아버지 연세가 높으시니까 아들·딸들의 장래를 위해 좀 기다리기로 하자는 합의였다.   극단적 이념대립의 부작용   이런 얘기를 끝냈는데 내 강연을 들은 몇 사람이 ‘그런 꼰대 할아버지’가 아직도 있을까, 라면서 웃음 반, 걱정 반이었다. 나는 속으로 가정을 위해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꼰대 기성세대’가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부터 한동안은 ‘꼰대’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이 유행했다. 꼰대 상사를 모시고 일하는 부하들, 생각과 사고방식에 융통성 없는 지도자들, 뜻밖에도 꼰대가 없는 사회를 책임져야 할 일부 종교계 지도자들까지도 정신적 꼰대를 면치 못하는 사례가 떠올랐다.     종교 국가라고 볼 수 있는 인도나 중동지역에 가면 그런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 꼰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보수 진영이나 좌파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극렬한 정치이념에 빠진 사람들은 그 꼰대 정신을 정치적 수단이나 상품화하기도 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관계도 그렇다. 두 민족이 불행했던 과거의 원한과 적개심을 다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우호 관계나 친일외교를 할 수 있느냐고 국민을 선동한다. 개인 간에서도 원수는 끝까지 갚아야 하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편 가르기를 하는 사고방식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와 젊은 세대 장래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21세기   나같이 일제강점기를 산 사람은 ‘꼰대 관념’을 벗어나기 힘들어도 해방 이후에 태어난 세대부터는 국민 장래를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회라면 몰라도 21세기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사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반(反)사회, 반(反)역사적인 꼰대 정신은 극복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일본의 아베 정권과 우리 문재인 정부 때를 연장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런데 예상 못 했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꼰대라는 말은 줄어들고 있는데 새로운 꼰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한때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노사모’가 생겼고, ‘박사모’가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 좋은 일은 아니나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빠’가 등장하고 ‘개딸’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새로운 ‘젊은 꼰대’가 사회의 혼란과 폐습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국민 다수가 ‘내로남불’이 되니까 무감각한 사회병이 되었는데, 지금은 꼰대 정신이 더 넓게 번지는 것 같다. 공산사회에서 흔히 보던 현상이고 독재정권이 조작해 정치 수단으로 삼았던 나라병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꼰대 할아버지’는 자연히 사라지겠지만 꼰대 정치 세력은 앞으로도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걱정하는 젊은 세대의 꼰대들은 관념의 한계를 넘어 행동화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꼰대가 깡패 행태까지 겸하게 되면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조성한다. 정치 지도자들까지 그런 꼰대 정신, 폭력 의지를 수용하면 국가적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마오쩌둥(毛澤東)도 같은 길을 따르지 않았는가.   폐쇄적 사회는 오래가지 못해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는 두 가지 주어진 목표가 있다. 자유를 각자가 누리면서도 윤리적 가치가 유지되는 사회, 인간적 가치가 인간애의 정신으로 공존이 존중시되는 세계 역사의 길이다. 고정관념이나 집단적 이기적 절대가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꼰대 정신이 지배하는 국가와 사회는 그 폐쇄적 사고와 가치관 때문에 스스로 종말을 자초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애국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선한 가치와 질서를 창조 육성하며, 휴머니즘을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책임이다. 보편적 가치를 역행하는 노동운동, 역사적 진실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목적의식, 인간의 가치와 생명력을 훼손하는 허위와 위선 모두가 꼰대 정신과 연결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어둡게 만드는 죄악을 범해서는 안 된다. 진실·자유·인간애는 자유민주 정신의 근원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할아버지 사회 e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연세 좌파 정치인들

2023-06-23

[김형석의 100년 산책] 자유를 찾아서…나도 탈북자의 한 사람이었다

1947년의 일이다. 해방 2년 후였기 때문에 북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정권 밑에서는 교육다운 교육이 불가능했기에 내가 추진해온 중고등교육을 단념하고 월남하기로 했다.   그해 여름방학이 되었다. 7월 10일이었다. 집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등지고 생각에 잠겼다가 꿈을 꾸었다. 제복을 입은 보안서원이 나타나 장총을 내게 겨누며 “왜 김일성대학에 교수로 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미안하다. 더 좋은 사람을 추천하기로 했으니까 좀 기다려 달라고 약속했다” 했더니, 그가 그렇게 됐느냐는 표정으로 하늘로 향해 발포했다.   아내와 함께 탈북자 수용소 갇혀   그 총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산 아래 동네를 내려보았다. 내 동생이 헐떡이면서 뛰어오더니 “형님, 빨리 산속으로 도망치세요. 저 아래 자동차에 김현석 장로가 잡혀가는데 형님도 잡으러 올라올 것 같아요”라고 했다. 차 한 대가 우리 집으로 오는 길목에 서 있고, 두 사람이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차가 다시 떠났다. 김 장로는 내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 이사장이었는데, 그날 체포되었다가 6·25 때 피살되었다.   나는 탈북을 서두르기로 했다. 8월 16일 아침, 아내는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나는 아무 짐도 갖지 않기로 했다. 평양에 들렀다가 다음 날 아침에 기차를 타고 사리원에서 해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탔다. 늦은 오후에 간신히 해주역에 도착했다. 가까이 있는 한 여관을 찾았다. 여관주인이 우리를 깊숙한 안방으로 안내했다. “안심해도 됩니다.” 탈북인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용강 바닷가로 가다가 검문을 받고 탈북자 수용소로 인계되었다. 초등학교 비슷한 두 채의 건물이었는데 앞 건물은 취조실과 남자수용소, 뒷 건물은 여자수용소였다. 나를 인계받은 계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벽에 걸린 전화통이 요란히 울렸다. 계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이상하게도 통화 내용이 내게까지 들려왔다. “○○계장입니다.” “오늘도 월남하다가 잡혀 온 놈들이 많아요?” “예, 어제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막 평양에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놈들은 책임지고 무조건 북송하라는 명령입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온 계장이 약간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딴방에 대기 중이던 아내에게 나오라고 했다. 부하 한 명을 불러 “이 가족을 버스 정거장에서 떠나는 것까지 보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가 나간 후에 갑자기 쪽지 생각이 났다. 나와 함께 교사로 있던 조 선생이 “혹시 도움이 될까 알려 드리는데 제 누님이 해주에 살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을 돕고 있는데 제가 전화번호를 드리겠습니다”라며 건넨 메모였다.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묻더니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여자는 내 아내를, 남자는 나를 이끌고 나섰다.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조 선생 누님이 인사를 하면서 “죄송하지만, 불편하시더라도 선생님은 다락방에서 쉬시고 사모님만 거실에 머물러 달라”고 했다. 검문관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언제 떠나겠느냐고 물었다. 빠를수록 좋다고 했더니, 오늘 밤이나 새벽에 떠나도록 해보자고 했다.   자정이 넘었을 때였다. 안내원을 따라나섰다. 수수밭 안으로 들어서더니 바다 쪽을 향해 숨을 죽이고 걸었다. 다행히 아들애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경비원들이 200~300m씩 왕복하면서 바닷가를 순시하고 있었다. 그 중간시간에 작은 나룻배가 와 닿았다. 탈북자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옆 숲속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서 배는 순식간에 만원이 되었다. 나는 아내를 태우고 더 올라탈 수가 없어 다음 배를 기다렸다. 10여 분 후에 또 한 척이 왔다. 남자 다섯이 곧바로 승선했다.   우리 배를 본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러나 배는 이미 바다에 들어선 뒤였다. 마치 작은 배들의 전쟁터 같았다. 경비원이 탄 배가 나룻배를 쫓아가고 나룻배들은 큰 어선 사이로 숨어가곤 했다. 사공이 “위급하게 되면 수영을 하는 손님은 바다로 뛰어들어 어선들 뒤에 숨어라”고 했다. 아내가 탄 배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들애가 울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하느님께 돌보아달라고 기도하였다.   하느님께 기도, “자유 만세” 외쳐   얼마 후 사공이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라고 했다. 한 사람이 “자유 만세!”를 선창했다. 나도 눈물을 닦았다. 새벽 시간이었다. 바다 남쪽 해안에는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있었다. 서북청년단원들이 월남한 사람들을 위해 새벽 한기를 피하도록 준비한 것이다. 사공이 “선생님들이, 우리도 자유로운 새 나라에서 살게 도와 달라”던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서북청년단원에게 아내 이름을 적어 주면서 내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모닥불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날 밤 탈북자가 50~60명, 또는 그 이상일 것 같기도 했다. 20여 분이 지났을까. 아내가 청년의 안내를 받아 찾아왔다. 우리는 말 없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 줄 믿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아내는 나를 위해,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드린 것에 대한 감사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경비정에 끌려가는 나룻배를 셋이나 보았다는 것이다. 아들애는 그제야 눈을 뜨면서 엄마 품에 안겼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음을 참고 참았다. 자유는 목숨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탈북자 자유 탈북자 수용소 아내 이름 자유 만세

2023-06-09

[김형석의 100년 산책] 100세 인생의 결론 “최선을 다해라, 더 큰 기회가 온다”

옛날에는 지방에서 온 손님을 만나면 혹시 어떤 가훈(家訓)이 있으세요, 또는 좌우명(座右銘)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 좋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가훈이나 좌우명에 집착하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강원도 양구, ‘철학의 집’ 내 가족사진이 있는 자리에는 두 글귀가 있다. ‘정신적으로는 상위권에,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에’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행복하다’이다. 앞의 문구는 내가 뜻하는 것이고, 다음 글귀는 아내의 삶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나는 슬하에 많은 가족을 두었다. 또 제자 중에는 큰 기업을 운영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더라도 사생활과 가정 경제는 중산층 수준이 좋다. 기업은 기업대로 독립된 공익기관이고 개인 생활은 정신적 가치가 중요하니까, 경제적 관심이나 부담에 빠지지 말라고 권한다.   ‘정신은 상위권에, 경제는 중산층에’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지도자 대부분은 중산층에서 태어났지 부유층 가정의 자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기업을 계승하는 일은 공인(公人)이고 사회 여러 분야의 지도자는 정신적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인격과 정신적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기업인도 될 수 있고 사회 각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과 경제가치의 노예가 된 사람은 기업인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나를 위한 좌우명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삶이란 계속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터득한 교훈이 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더 소중한 일을 하게 된다’는 신념이다.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일의 목적을 자기에게 두는 사람은 일의 가치와 역행하게 된다. 일의 목적을 사회적 가치가 아닌 주어진 집단이나 이기적 목적에 두는 사람은 사회악을 범할 수 있다. 사회경제를 병들게 하는 노동조합들이 그렇다.   일의 목적을 사회 전체에 부합시키는 사람이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공직 그 자체가 목적이 못되고 더 높은 출세나 진급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도 자주 보게 된다. 서울특별시 시장이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인가. 그런데 시민을 위하기보다 대통령으로 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시장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공직자가 정권욕의 노예가 되면 범하는 잘못이다. 독재국가에 가면 대통령이나 수상이 자신의 인기나 명예를 위해 국가행사까지 수단으로 삼고 이용한다.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아 온 현상이다.   나는 군인이나 공무원들에게 이야기해 온 경험이 많다. 직책에 따른 계급의식이 강한 공동체에서는 진급이나 상위 보직에 대한 경쟁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크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승진이나 높은 직위를 위해 과욕을 부리는 사람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성취하고 늦게 출발하더라도 중책을 찾아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다. 욕심이 앞서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교훈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충고이다.   일의 결과는 직위가 아니고 사회적 기여도에서 나타난다. 나 같은 사람은 대학에서 보직을 맡는 경우가 적었다. 기회가 오더라도 나보다 더 유능한 동료에게 양보하고 강의와 학문에 열중하고 싶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외국에 가거나 사회에 나가면 제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교실에서 내 강의를 들은 제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 더 소중한 일을 하게 된다’는 체험을 한 것은 나의 신앙적 인생관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입학을 소원하면서 약속의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나도 다른 사람들같이 어른이 될 때까지 건강을 하락해 주시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하느님의 일을 하겠습니다’는 기도였다. 내 건강이 거의 절망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욕심이나 희망이 없었다.   건강의 비결은 남을 위한 봉사   그런 출발에서인지 지금까지 항상 일이 먼저 주어졌다. 나 자신이 직업을 찾아간 경험은 단 한 번뿐이다. 27세에 탈북 월남하고 뒤늦은 학기 도중에 중앙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7년 후 연세대의 초청을 받은 후부터는 지금까지 주어진 일에 정성을 쏟아 온 셈이다. 내 건강이 남달리 유지되는 것도 주어진 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앙학교 7년 동안의 노력도 헛되지 않았다. 나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인재들이 사회에 진출하였다. 미국, 캐나다, 한국 안에서 높은 평가와 존경받는 교수만 15~16명에 이른다. 또 교주인 인촌 선생의 뒤를 따르는 동안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교훈을 터득할 수 있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더 높은 인생의 수련 기간이 되었다.   내가 100세를 넘기면서 얻은 결론은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일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을 돕는 데 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더 큰 봉사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인생관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인생 결론 사회적 가치 신앙적 인생관 정신적 가치

2023-05-26

[김형석의 100년 산책] 지금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그 꿈’ 셋

사람에 따라 생활 습관이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꿈을 많이 꾸는 편인 것 같다. 그 가운데 각별하게 꾼 꿈이 셋 있다. 모두 나와 국가와 연결된 꿈이어서 평생 잊을 수 없다. 때때로 그 뜻을 되새겨 보곤 한다.   그 하나는 8·15광복 전날 밤과 새벽에 꾼 꿈이다. 내가 평양 서남쪽 진남포 바닷가에 갔는데 중학생 때부터 나를 키워 준 마우리 선교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바닷가였는데 커다란 창고 두 채만 남아 있었다. 선교사의 안내로 두 창고를 살펴보았다. 일본인들의 시신이 높은 창고 지붕에까지 닿을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 창고에는 대학 동창이었던 일본 친구의 시신도 있었다. 바닷물 때문이었는지, 모든 시체가 부풀어 있었다.   25세 때부터 평생 지켜온 교육자 자리   다시 잠들었는데 이번에는 쟁반같이 큰 태양이 서쪽이 아니고 동쪽 산 위로 서서히 낙하해 지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넓은 옥토 한 편에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해는 저물고 저렇게 넓은 광야를 어떻게 다 갈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깨어났다.   그런 꿈이 계기가 되었을까. 나는 스물다섯 나이에 교육계에서 평생을 보내는 인생을 선택했다. 나이가 들수록 갈아야 할 밭이 넓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5년 뒤, 두 번째 꿈이다. 1950년 정월 초하룻날 밤이다. 내가 서울집 안에 잠들어 있었는데 가까운 문 앞에서 이상한 진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놀라서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내 오른쪽 앞과 왼쪽 뒤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왼편 북쪽을 바라다보았다. 행진하는 군대 멀리 뒤에는 소련 스탈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공산군이었다. 무장한 군인들은 한국 사람이기보다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군대 같았다.   그해 6월 25일이다. 전쟁 소식이 서울 시내를 뒤덮었다. 주말에 휴가를 나왔던 군인들은 부대로 돌아가고, 용산에 신축된 육군회관 낙성식에 초대를 받아 잔치에 참여하고 있던 지휘관들은 서둘러 전선으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근무하던 중앙학교 심형필 교장에게 제안했다. 이번 전투는 전쟁이고 서울이 점령당할지 모르니까 은행에 적금한 학교 재정을 되찾아 교직원에게 3개월치 봉급을 선불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심 교장은 내 뜻을 받아들여 재단이사장인 인촌 김성수의 승낙을 받았다. 그 덕택으로 우리 학교 교직원들은 3개월의 어려운 기간을 편히 넘길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계기로 서른 살  새내기 교사였던 내가 인촌의 뜻에 따라 젊은 교감이 되고 많은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인 부정선거 투표를 감행했다. 애국심을 갖고 투표에 임했던 사람들이 더 침묵할 수가 없었다. 마산의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시작했다. 대구에서도 젊은 학생들이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는 항의 데모에 동참했다. 그때 나는 연세대에서 6년 차를 맞고 있었다.   가시관 쓴 예수 보고 깜짝 놀라   4월 10일 밤 꿈이었다. 내가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쪽을 혼자 걷고 있었다. 밤과 낮을 구별할 수 없고 역사의 시계는 멈춘 듯이 만물이 잠들어 있었다. 태양 볕도 달빛도 아닌 미명의 빛이 온 세상을 감싸고, 인적이 사라진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광화문까지 갔더니, 사거리 한가운데에 구형으로 된 땅이 꺼져 있었다. 내려다보았다. 십자가에서 방금 내려놓은 것 같은 예수의 시신이 머리 방향을 동쪽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 창으로 찔린 자국 자리에서는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가시관을 그대로 쓴 자세였다. 너무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두 번째 데모가 일어났다.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끝내고 돌아가다가 자유당이 사주한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거리에 쓰러지기도 했다. 날이 밝으면서 서울을 선두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행진이 벌어졌다.   나는 연세대생들과 함께 신촌에서 시청 앞과 광화문 쪽으로 행진하는 데모대에 참가하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질 때까지 서울역에서 시청 앞,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 앞까지 데모 군중으로 메워졌고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그때부터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데모는 밤늦게까지 계속되다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기대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218명의 학생과 데모대원이 희생되었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지도자라면 국민과 아픔 나눠야   나도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때는 이승만에 대한 원한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마음은 더 아팠을 것이다. 조국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그의 마음이야 얼마나 아팠겠는가. 이승만 주변 범죄자들의 엄벌을 바라는 마음도 컸다.   그렇다고 민족적 아픔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아픈 마음을 같이 하는 국민에게 있다. 그 아픔을 모르는 지도자나 공직자를 배제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과 아픔을 함께하는 지도자들과 아픈 마음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는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일본 공산군 부정선거 투표 항의 데모 마우리 선교사

2023-05-12

[김형석의 100년 산책] 내 청춘을 채워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지난 달 3일에 톨스토이 권위자 박형규 교수가 92세로 작고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를 번역한 러시아 문학 전문가였다. 그 부음 소식을 보면서, 한 번도 대면한 적은 없으나 러시아 문학의 동지 한 사람을 먼저 보낸 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내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 제목이 그럴듯해 보여서 읽기 시작했다. 상당부분 읽은 후에야 그 책이 장편소설이고,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생각해도 철없는 모험을 했다. 다 읽고 난 후에는 재미에 끌려 『안나 카레리나』도 읽었다. 그 후에는 그 당시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차지한 『부활』까지 읽었다. 그다음에는 그의 사상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인생론과 종교관 등이다.   톨스토이 전문가 박형규 교수 타계   일본대학 예과 때였다. 서양사 교수가 “지난 여름방학 동안에 좋은 독서를 한 학생이 있으면 잠시 시간을 할애해 줄 테니까 누구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때 한 친구가 “김형석군의 톨스토이 강의를 추천한다”고 했다. 그래서 톨스토이 얘기를 시작했다. 20분 정도 지났는데, 동급생들이 흥미보다도 장난삼아 더 계속하라고 해 교수 강의 대신 톨스토이 강의를 했다.     그다음부터는 동급생들 간에 ‘톨스토이 전문가’ 비슷한 별칭이 생겼다. 그때가 생각났다. “박 교수보다 내가 20년이나 일찍 톨스토이 전문가였는데…”라는 사념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지나갔다.   돌이켜 보면 톨스토이를 읽기 시작할 때부터 9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톨스토이와 인도의 간디는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 두 사람의 정신적 영향은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전쟁과 평화』가 나에게 남겨 준 정신적 유산은 계란 속에 잠재해 있는 문학예술이라고 할까. 계란을 깨고 태어날 때까지는 나도 모르는 문학과 예술의 원천이었던 것 같다.   나의 글과 사상 속에 어떤 예술성이 있다면 그 샘의 근원은 톨스토이가 안겨 준 선물이다. 『전쟁과 평화』 속에는 톨스토이의 사상이 형상 모르게 잠재해 있다. 대자연 속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그의 글에는 역사를 지배하는 어떤 섭리가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톨스토이의 영향 때문에 러시아 소설과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영·독·불 문학보다 러시아 문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톨스토이를 떠나 도스토옙스키의 철학과 인간 문제, 종교관 전체와 만나게 되었다. 내가 중학생 때 여론조사에 따르면, 소설 주인공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라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   『죄와 벌』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인간의 처참함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준다. 매춘부의 방에 들렀던 라스콜니코프가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 앞에서 “나는 하느님은 모르겠으나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에는 무릎을 꿇는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인간적 삶의 수많은 근본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본능적 향락에 취해 있는 아버지, 정직과 정의를 믿고 사는 군 출신의 큰아들, 철학적 회의주의에 빠진 둘째 아들, 수도원에서 순수한 신앙적 양심을 믿고 자라는 셋째 아들, 세상과 인생을 비웃으면서 사는 혼외아들, 생각 있는 독자는 나는 그중에 누구인가를 묻게 한다.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던져준다.   내가 대학생 때는 독일 철학자 니체, 덴마크 기독교 사상가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을 궁금해하는 젊은이들의 필독 저자들이었다.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패전을 앞두고 실의에 빠졌을 때 독일의 히틀러가 니체 전집을 보내주었을 만큼 니체의 ‘권력의지’는 독일적 성격을 지닌 철학자였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의 책들이 20세기 초창기를 전후해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독일·유럽·일본·미국사상계를 휩쓸었다. 유신론적 실존철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니체와 키에르케고르가 끼친 영향   도스토엡스키가 남긴 파장도 엄청났다. 내가 1962년 하버드대에 머물렀을 때였다. 세계적 신학자로 알려진 P 틸리히 교수도 강의를 위해 5권의 책을 추천하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언급하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복잡한 인간사를 가장 다양하게 서술하였기 때문일 게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영국·프랑스·독일 다음에 러시아가 세계 정신무대에 진출할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러시아가 공산국가로 전락하면서 사상의 자유가 배제되고 인문학이 버림받게 되면서 정신문화는 황무지가 되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문예부흥이 가능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공산정권은 그 희망까지 허락지 않았다. 지금은 푸틴이 제2의 스탈린의 후계자가 되고 있다.   레닌·스탈린의 뒤를 추종했던 북한의 현실이 같은 불운을 떠안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은 제2의 모택동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등소평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오늘의 중국은 제2의 냉전시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인문학과 휴머니즘의 단절과 붕괴가 그렇게 중대한 역사적 변화를 초래할 줄 몰랐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톨스토이 전문가 톨스토이 강의 톨스토이 권위자

2023-04-28

[김형석의 100년 산책] 한·일관계 닦는 길, 우리 주변의 소중한 이야기들

박대인(朴大仁)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서 30여 년을 보내고 귀국한 일이 있다. 그는 내 집 바로 옆에 살았고, 해서 매우 가까이 지냈다. 박 선교사가 교회에서 전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동남아시아에 와 있는 외국 선교사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일본에서 온 한 선교사를 만났다. 일본 선교사는 박 선교사가 한국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나누게 되었다. 그 일본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다.   태평양 전쟁이 종반기에 이르면서 일본 도쿄 시민들이 미국의 공습을 피해 피난을 서둘렀다. 그 선교사는 갈 곳을 찾다가 어떤 시골로 갔다. 아는 사람도 없지만 모두가 전쟁에 시달려 자신들을 위한 걱정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한 가정 내외가 찾아와 인사를 하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겠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야”   이후 두 가정은 서로 친해졌고, 그 선교사는 마음으로부터 감사했다. 피난 온 객지에서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 전쟁은 끝나고 선교사 가족은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 자기를 도와 준 가정이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말은 안 했으나 크리스천 가족이었다. 선교사 가정을 떠나보내면서도 “편안히 가시고 행복하시기를 계속 기도드리겠다며”는 송별 인사를 하였다. 자기는 도움을 받았으나 떠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는데 “기도해 드리겠다”는 사랑의 음성이 감동으로 남았다.   몇 해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그때까지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한 교회당 앞을 지나다가, 피난지에서 만났던 가정이 생각나 교회당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경험이었으나 두세 차례 교회 집회에 참석하면서 담임목사와 말문을 트고, 친교도 깊어졌다.   그런 일이 계기가 되어, 신앙을 얻은 그는 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일본보다는 불교사회로 볼 수 있는 지역에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름 없는 한 한국 교인의 기도로 자신이 선교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일본 선교사의 체험담을 소개하면서 박 선교사는 그 한국인은 일본인의 모범이 되었고, 선교사를 보내는 숨은 공로자가 되었다면서 일본인의 존경을 받는 한국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또 하나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다닌 숭실중학교에서는 매일 채플 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피아노 반주를 하는 이현웅이라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회에서 피아노를 배웠던 것 같다. 3학년 때 내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간 들려오는 이야기들로 친구의 행적을 짐작해 보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으로 간 친구는 음악 공부를 하던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남태평양 전선까지 갔다가 종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런 처지에 놓인 한국인들이 귀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다가 사랑하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이제는 떳떳한 한국인으로 국제 결혼을 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음악 실력과 작곡이 인정과 평가를 받아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름을 바꾸고 국적을 옮겼다. 나중에는 저명한 작곡가와 연주가로 교수가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일본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누구인지 모르고 지냈다. 중학교 선배인 그의 친형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형도 특이한 생애를 살았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일찍 미국 유학을 했다.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으나 미국 교회나 한인 교회를 떠나 미국 원주민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다. 원주민은 물론 미국 기독교계에서도 관심과 존경을 받는 목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두세 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그 형 목사의 얘기다. “내 동생은 지금도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는 한국인들로부터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동생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한국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두 나라 젊은이들이 협력해야”   2001년 1월 26일에는 일본 도쿄를 여행하던 이수현군이 전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출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27세의 젊은 대학생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일제강점기에 탄광에 징용되어 갔던 과거가 있었다. 73세가 된 이군의 어머니는 “역사의 과거를 잊기는 힘들어도 두 나라의 젊은이들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심정을 고백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는 일본과 동등한 위상의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서로가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해 주었다.   역사의 과거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미래 창출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 그 의무를 방해하거나 포기하는 국가에게는 영광스러운 희망이 찾아오지 않는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일본 이야기 선교사 가족 외국 선교사 선교사 가정

2023-04-14

[김형석의 100년 산책]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왜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나

나는 직장이나 공동체 내 인간관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초등학교 교사로 1년간 일했으나 그 학교는 교사가 셋뿐인 가정적 분위기였다. 중학교 선생님들과 초등학교 교사인 나 사이엔 직책과 인격의 차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보다 한 차원 낮은 선생 같은 아쉬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런 느낌이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뒷받침했을지 모른다.   대학을 끝내고 해방이 되면서 고향에 있는 중등학교를 운영했다. 고향 주변의 청소년들에게 중등교육까지는 책임지자는 뜻에서였다. 함께한 교사들은 중학교와 대학 동기들이었다. 역시 가족 분위기였고, 학생들은 순박한 시골의 청소년들이었다.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가르치는 것은 빙판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생존 자체가 위험한 처지가 되었다.   이승만과 김성수, 무엇이 달랐나   2년 후에 탈북하고 서울 중앙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직장다운 일터에 들어선 셈이다. 자연히 공동체 안의 내 위상과 대인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정치계 현실이 끼친 영향도 있었다. 그즈음 터득한 몇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첫째, 상사에게 아첨하는 일은 하지 말자. 내가 상사나 지도자가 되면 절대로 아첨을 일삼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첨 분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했다. 인촌 김성수는 함께한 사람들과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눴기에 모범적인 인간관계를 남겼다.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동료와 선의의 경쟁은 좋으나 상대를 비방하거나 나보다 안 되기를 바라는 반(反)인격적인 행위는 하지 말자. 내 인품과 인격을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선한 사회생활에서 밀려날 뿐이다.   셋째, 같은 직장이나 공동체서 편 가르기를 하는 어리석은 과오를 범하지 말자. 윗사람이나 동료를 대할 때 서로 존중하며 공생의 미덕을 높여야 한다. 정치계의 편 가르기가 국사를 망치는 사례를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연세대에 오면서 두 가지 기대를 품었다. 중고등교사보다 인격과 학문의 수준이 높은 선배들과 함께하기에 인격함양과 학문발전의 희망을 안고 출발했다. 내 대학동료들은 먼저 교수가 되었고 나는 10년 정도 학문을 소홀히 했으므로 나 자신의 부족을 인정했다. 그러나 5~6년 후에는 그 거리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교수의 수준과 학문적 열정이 기대보다 높지 못했던 것 같았다.   도산·인촌 등 사회 지도자와 교류     내가 중앙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 신인 교사에게 당부했다. “우리 학교에 있는 동안에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의 길을 걷든지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간직해 주세요. 둘 다 놓치고 60세가 되면 후회하게 되고 인생의 공허감과 낙후감을 갖게 됩니다”라고 했다.   대학에 몸담고 있을 때도 모범이 될 만큼 인격과 품위를 갖춘 선배나 동료는 많지 않았다. 내가 대학 다닐 때의 교수들과 차이가 있어 보였다. 학문적 열정과 인격적 소양에서는 나도 비슷한 위치에서 출발해 늦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대학에 오기 전부터 도산·인촌을 비롯해 여러 종교계 지도자나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았다. 특히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교류는 다른 교수들보다 앞서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운동권 학생들의 활동이 표면화하면서 같은 계통의 일부 교수들이 편 가르기에 앞장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상과 학문은 물론 대학교육의 전통과도 어긋나는 태도였다. 기독교교육이 폐쇄적이 되면 인문학의 우수성과 창조적 가치창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대학을 떠날 때쯤 되어서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내가 존경하는 김태길·안병욱을 비롯한 친구들이 대학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학문적 열성과 높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배와 제자들이 그런 소중한 친구들을 사표로 삼으면서 대학의 전통을 이어가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들의 애국심과 지성사회를 위한 성의 있는 노력이 새 역사를 이끌어 갈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큰 소가 떠나면 작은 소가 지켜     큰 소가 떠나면 작은 소가 자라 그 뒤를 계승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요사이 나는 후배 교수들에게 “총장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되라”고 권고한다. 그런 교수는 대학의 운영을 책임 진 총장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협조하게 된다. 세계를 이끌어 가는 대학이 모두 그렇다.   내가 교육계로 진출한 때는 교육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있을 때는 훌륭한 대학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떠난 뒤부터는 넓은 사회와 유구한 역사의 고장에 다시 동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그만큼 성장했거나 지도력을 갖추었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나무는 홀로일 때는 영향이 크지 않다가 같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게 되면 그 공동체는 역사의 주체가 된다. 그 숲이 한 산을 차지하면 위대한 유산을 남길 수 있다. 지성인의 사명이 그런 것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초등학교 대학교수 고향 초등학교 신인 교사 중학교 선생님들

2023-03-31

[김형석의 100년 산책] 14살 때 죽음 앞두고 올린 기도, 평생 지킨 '기도하는삶'

나의 정신적 불행은 일제강점기, 12살부터 시작되었다. 고향의 초등학교는 4학년까지 다녔다. 부친이 주변 학교 중에서 칠골의 창덕소학교가 가깝고 좋겠다고 생각해 편입시험을 보러 갔다. 부친을 따라 교무실로 들어갔는데, 5~6학년 담임이었던 윤태영 선생이 일본어를 전혀 배우지 못해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그때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교장 심 목사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애가 똑똑해 보이니까 붙여주라”고 했다. 그때부터 해방까지 13년 동안, 우리글과 일본어를 함께 배우며 살았다. 솔직히 생활은 우리말로 했지만 읽고 쓰는 데선 일본어 비중이 커졌다. 식민지 민족의 슬픈 운명이었다.   그런 과거 때문에 지금도 한글 문장력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30대 중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저술에 자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일찍부터 교회에 나갔고 기독교 학교에 다녔다. 내 정신과 사상의 기반이 당초 동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서양철학을 전공하여서 동양 및 한국 전통과는 조우할 기회가 적었다. 내 사상의 그릇에 동서양이란 대립하는 정신을 함께 담을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자란 세대들의 불운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세대들의 역사적 불운이었다. 서양 학문과 사상, 특히 철학을 전공한 학자나 교수들에게 주어진 공통된 숙명이기도 했다. 문자로 표출되지 않는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요나 가곡을 제외하고는 한국 전통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여유가 없었다. 대학강의를 하면서도 한국적인 정신과 전통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괴심마저 들었다. 한국적인 것이 빈약한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갖게 된 분야가 회화를 중심으로 한 한국미술이었다. 사실 회화에 대한 예술의식 비슷한 것은 대학 시절에 키울 수 있었다. 대학생 때 도쿄 우에노 공원에 있는 도쿄 도립미술관 지하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관이어서 일본 회화는 물론 서양화가들의 전시회도 연중 열렸다. 식당 위층이 전시장이어서 일본화 대가들을 자주 감상하게 되었다. 그림 미술의 예술성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후 서울에서 한국 화가들의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중국의 전통 화풍에서 벗어난 한국적인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좀 더 한국적인 것을 찾아보다가 문인화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선비들이 학문이나 시를 쓰다가 취미 삼아 그린 그림들이다. 궁중화가나 전문화가 작품보다 한국인다운 느낌이 더 물씬하였다. 그리고 민화(民畵)를 접했다. 이것이 한국 특유의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 있는 작가도 아니고 목적이 뚜렷한 그림도 아닌 생활의 필요나 재미에서 탄생한 그림들이다. 그 수는 많지 않았으나 전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개성이 뚜렷하고, 창작열 뜨거운 작품들이다.   몇십 년 국전을 관람하면서 동양화나 서양화의 주류를 벗어난 한국적 회화가 태어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국 회화의 장래가 희망적으로 보였다. 그림 감상의 기쁨이 배가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서울 골동품상 흔하게 볼 수 있는 옛날 도자기들도 우연히 살피게 되었다. 고려시대 작품들은 고급스럽고 예술성이 풍부하나 중국적인 전통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우아한 색채와 상감이 중국 것을 능가하였지만 말이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주변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것’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류도 다양해졌다. 그 본령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백자이다. 달항아리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일상용품 백자가 빚어졌다. 조선 초기의 다양한 백자는 우리 조상들의 일상과 함께하는 예술성을 품고 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도자기들을 찾아다니면서 안복(眼福)을 많이 누렸다. 비로소 한국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예술성을 느끼는 듯했다. 이후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도 도자기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내 경험을 돌아볼 때 가장 많은 종류의 도자기를 소장한 곳은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박물관이다. 동서양 작품이 두루 모여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 가도 한국적인 것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정감 넘치는 도자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선 후기의 작품들은 생활미와 예술미, 그 둘의 조화미가 빼어나다.   생활미와 예술미 두루 갖춘 백자   가격도 부담이 적어 한두 점씩 사 모은 것이 이제 몇백점에 이르게 되었다. 인연 있는 중고등학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상당수 작품을 보내기도 하고, 나머지는 강원도 양구 근현대사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내 기념관인 ‘철학의 집’에 여러 점을 비치하기도 했다. 양구 박물관의 내 도자기 방에는 두 점의 문인화, 조지훈이 도자기를 예찬한 시도 걸려 있다. 규모는 작지만 지방박물관에서는 보기 드문 전시실이 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 개념은 과장된 표현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국가와 민족은 인간적인 것을 간직하면서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의 보편성에 들어가 있는 특수성을 갖는다. 그 특수성을 창조해내는 예술가들이 우리 자신이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적 공통성을 지닌 예술성이다. 핵심은 예술인 자신들의 인간적 보편성을 갖는 창조정신이다. 그런 한국적 특수성이 모여 세계적인 보편성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죽음 기도 한국 전통음악 한국 화가들 한국 특유

2023-03-17

[김형석의 100년 산책]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

김영삼 정부 때였다. 정계 2인자로 인정받던 김종필을 중심으로 교육계 지도자들이 모였다. 일본과 한국에서 크게 번지고 있는 학원폭력과 청소년들의 반(反)사회질서 행태들을 예방 선도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좌담회였다.   내가 그 해결 방향과 방법을 위한 두 가지 제안을 했다. 첫째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재 중에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 주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편입하는 내용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인문·사회 문제를 중심으로 인격의 가치와 인권의 절대성은 물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의 사회적 가치를 존중하는 정신과 사상을 계속 일러주자는 제안이었다.   교회에서도, 기업에서도 반응 좋아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는 청소년 기간에 봉사정신을 생활화하는 것이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대학입학 조건에 학업, 예능소양, 건강과 운동 여부, 학생회 등을 통한 리더십, 그리고 봉사경력은 필수조건으로 삼고 있다. 학업성적은 고교 시절보다 대학에서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가지 실례를 들었다.   내가 국군 정신교육 지도위원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였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보이스카우트나 기독교 YMCA 등을 통해 봉사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군인은 군 생활에서 사고를 일으킨 통계가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하지만 손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통계였다. 나도 국군의 방송에서는 그런 구체적 실례를 소개해 주곤 했다.   새문안장로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방학에 수양회에 다녀와서는 불평이 있었다. 식사에 대한 불만, 잠자리에 관한 불편, 예배시간 강요 등이었다. 황광은 목사가 다음 해부터는 방향을 바꾸었다. 휴전선 밑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다. 땀 흘리고 고달픈 경험이었다. 그런데 끝내고 돌아왔을 때 불평불만이 없었다. 다음 해에 또 가겠다는 학생이 더 많았다.   그 당시에는 많은 기업체가 연수원을 통해 사원교육을 많이 했다. 내가 전주 지역 삼성생명 여사원들을 위한 강의에 참석했을 때다. 3~4일간의 교육 기간에 한나절은 농촌지방 가정들을 위한 봉사경험을 권고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연수를 끝내는 평가회에서 많은 사원이 봉사경험이 가장 좋았다고 대답하였다.   고맙게도 정부 정책을 위한 그 모임에서 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봉사활동시간을 할애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런데 그 실효를 거두기 힘들었다. 선생님들이 적극적이지 못했고 돈은 많으나 교육 가치를 모르는 어머니들이 승용차를 타고 아들딸을 데리고 대리로 일해주고 봉사점수를 채워주는 일까지 있었다. 문제는 부유하면서 자녀교육을 모르는 학부모에게 있었다. 청소년보다는 학부모 교육이 선결 과제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긴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먼저 교육다운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 기성세대에 있다. 교육행정을 맡은 교육계 인사들이다. 인간교육보다 지식전달을 위한 교육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일본의 한 사례가 있었다. 도쿄의 한 중고등학교 교사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정학처분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 어떤 도움을 줄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재직 학교에 사표를 내고 도쿄시의 한 공한지를 찾아 노후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된 버스 차량을 준비했다. 그 버스 한 대씩을 교실 삼아 퇴학이나 정학을 받은 학생들에게 재교육했다. 희망이 있는 학생들은 본교나 다른 학교로 다시 취학하도록 도와주고, 돌보아 줄 수 없는 학생은 계속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 사실을 안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문제 학생들을 버스학교로 의탁하기도 했다.   그 교사가 교육계의 지목과 관심을 받게 되면서 언론기관들이 교육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교사의 의견을 묻는 기회가 많아졌다. 나는 우연히 그 기록을 보았다. 그 선생의 목표는 ‘사랑이 있는 교육’이었다. 초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생 중에도 ‘사랑이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는 주장이었다. 버스교실에는 사랑의 교류가 있었다.   넓은 운동장보다 교사의 따뜻한 정   그 선생은 ‘작은 학교’ 운동을 강조했다. 좋은 시설, 넓은 운동장, 많은 수의 스승보다 교실에서 따뜻한 정과 사랑이 있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교육정책을 주장했다. 나도 해방 후 2년 동안 북한에서 그런 교육을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도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최근 우리는 교사의 수는 그대로 유지되는데 학생 수가 줄어드는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초·중고등학교의 큰 문제가 되었다. 교실의 학생 수를 줄이고 선생님들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작은 교실’로 전환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린 학생들의 성장은 빠르고 대부분의 상급반 여선생들의 고충도 커지고 있는 현상이다. 먼 후일에는 지금과 같은 대형 학교보다 사랑이 있는 작은 교실과 작은 학교들이 더 쓸모 있는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수와 양적 확장보다 인간교육의 성패에 달려 있다. 정신가치의 계발, 생활 질서의 육성이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일본 사랑 교육계 지도자들 중고등학교 봉사활동시간 중고등학교 교사

2023-03-03

[김형석의 100년 산책] 우리 정치에 미래와 희망이 있는가

한때 행동과학 계통 사람들의 주장이 많은 영향을 남겼다. 사람은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옛날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밖으로부터의 운명은 바꿀 수 없다고 했다. 반면 셰익스피어 비극에선 운명은 인간적 한계 안에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격이 곧 운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격을 바꾸면 운명도 변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성격을 어떻게 바꾸는가. 습관을 바꾸면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성격이 달라진다. 습관은 행동을 계속해 바꾸면 달라질 수 있다. 행동을 바꾸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다. 생각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성격은 누구나 바꿀 수 있고 또 바꾸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 교리주의와 정치 교조주의   문제는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종교적 신앙을 교리주의로 받아들이면 신앙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가치를 교조주의로 절대화하는 사람은 그 가치관 때문에 생각을 바꾸기 힘들어진다. 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을 절대가치로 삼기 때문에 좀처럼 정치의 방향과 방법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 민족도 어떤 면에선 그런 인습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흑백논리와 파벌의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방 직후 분단 때문에 정치적으로 만든 사고방식도 그렇다. 북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승만이 친일파와 합작한 정권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고, 순수 우리 민족에 의한 정권이 민족 전통을 계승하는 정부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습성과 정치의식이 합쳐져 마치 개인과 가문이 원수를 갚아야 하듯이 국가 간의 적대세력을 타파·극복하는 것이 국가적 의무라고 착각한다. 원수를 갚지 못하면 개인과 가문의 도리가 아니듯이 적대세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면 국가 간 협력과 공동가치 추구는 불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   지금 우리도 그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해방 후부터 한·일관계는 시련을 거듭해 왔다. 문재인 정부가 되면서 항일을 애국이고 친일은 반국가적 행위라는 해방 이전까지의 선입견 때문에 막대한 국가적 손실을 보았다. 젊은 세대와 자유 세계를 위한 희망도 훼손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는 국가 간의 보상 문제가 있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평화적 화해와 양국의 협력을 협약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아시아의 희망을 되찾기 원했다.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도 끝나지 못했는데 문 정부 때 제기된 미쓰비시 회사와의 강제징용 문제가 다시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문 정부의 정치관에 따른다면 해결될 길이 열리지 못한다. 원수를 다 갚지 못하면 미래로 나갈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런 방향으로 국민까지 유도해 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 점에서는 일본 아베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보상은 이미 끝났기 때문에 일본에는 자기네 선택이 있을 뿐이라고 맞섰다.   두 잘못된 지도자 때문에 두 나라 국민의 고통과 피해가 얼마나 컸는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그 후유증과 불행의 결과를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언제나 미래를 위한 현재의 선택을 원하며 양국 간의 문제는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위안부 문제는 인권의 문제다. 인권의 문제는 경제적 보상 여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진실을 세계와 인류에게 알리는 일이다. 일본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는 그 국민의 도덕적 수준에 속한다. 진실을 알린다는 것은 역사적 죄악이 무엇이며 다시는 그런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의무와 호소이다. 대한민국은 그런 범악을 저지르게 해서도 안 되며 그런 가능성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자기반성의 책임자다. 진실을 알린다는 의무는 여전히 남아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어 온 국내문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미쓰비시 회사의 강제징용 문제가 과거 양국관계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국민은 잘 모른다. 이런 문제는 한 회사와의 문제이기 이전에 국가 간의 문제다. 나와 내 친구들은 학도병으로 전선에 끌려가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 문제는 왜 다루지 않는가. 비슷한 사건은 수없이 많았다. 어떤 정권이 국내 문제를 위해 80년 전의 사건을 문제 삼았다는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평화와 미래 얘기해야   아베 정부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수출규제로 보복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막중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두 나라 정상이 역사와 세계정세의 미래를 어떻게 보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젊은 세대들의 장래와 아시아와 세계역사의 희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21세기의 지도자답지 못했다. 과거를 미래로까지 연장하려는 정치를 반성하고 극복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미래를 위하는 정치이고 자유의 가치는 평화와 인간의 가치 창출을 위한 소중한 의무이다. 과거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포기하며 큰 결실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민족과 국가에는 희망이 없다.    지금 우리 정당과 정치인들의 자세를 보면 국내 문제까지 과거의 원한에 붙잡혀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오늘의 분열과 싸움이 그대로 계승·연장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더불어민주당에는 미래가 없고, 국민의힘은 새로 태어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집안싸움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계가 국제 문제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걱정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정치 미래 강제징용 문제 보상 문제 정치 교조주의

2023-02-17

[김형석의 100년 산책] 자본주의의 끝없는 진화, 경제의 목표는 휴머니즘 고양

옛날 일이다. 강연을 끝내고 학생들의 질문 시간이 되었다. 한 학생이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빈부의 격차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의 더 소중한 과제를 소홀히 하면 큰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 경제가 인간생활의 전부도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쉬운 예가 생각난다.     나는 교수이고 가난하다. 내가 바람이 불고 먼지가 휘날리는 거리를 걷고 있는데, 내 동창이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다가 옆에 와 서면서 ‘내 차를 타라’고 권했다. 옆자리에 앉았던 내가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내가 너보다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는데 너는 자가용을 타고 나는 걸으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친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러면 내 자가용차와 너의 학문, 사상과 바꾸자. 나는 네가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내가 ‘야! 그런 철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네 재산을 다 준대도 내 학문과는 바꿀 수 없지.’” 누구의 판단이 옳았는가.   부유한 사업가와 가난한 교수   그렇다면 가장 소망스러운 사회는 어떤 편인가. 경제적으로 소외되지 않고 기본소득이 보장될 수 있으면, 그 후에는 모든 사람 각자가 원하며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찾아 행복한 생활을 즐기면 된다. 인생은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구현에서 조화롭고 보람 있는 삶을 완성하면 된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생각 못 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시스티나 교회 벽화를 보려고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얻는 수입이 해마다 5억 달러는 된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어떤 기업가도 그런 경제적 혜택을 남겨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제의 기초는 의식주의 해결로 그칠 수 있으나 그 후에는 학문 예술 등 정신적 가치와 문화적 혜택이 목적이 된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 있을 때 운동권 출신들이 문재인 정부에서 예전에 내게 질문한 학생의 경제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과제를 붙들고 권력으로 국민경제를 이끌려고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기초적인 인문학적 소양만 갖추고 있었어도 해결하였을 문제들이다.   그때와 비슷한 1961년 겨울이었다. 뉴욕에 갔다가 경제학을 전공하는 후배를 만났다. 내가 물었다. “처음 미국에 와서 한 학기를 보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여기 아메리카라는 큰 수박이 있는데 정치에서는 의회민주주의가 최선의 길임을 인정하겠는데, 경제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정책이 좋을 것 같다. 최근에는 사회주의자들까지도 자본주의는 곧 끝날 것이고 공산주의가 사회경제의 최상의 길이라고 주장할 정도가 되었는데”라고 했다.   그 교수의 대답을 잊을 수 없다. “얼마 전 소련의 흐루쇼프 수상이 미국을 다녀갔다. 유엔에서 연설을 끝내고 뉴욕거리를 지나다가 록펠러센터 앞에서, ‘한두 개인이 이렇게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밑에서 희생당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의 기자가 반박했다. ‘흐루쇼프 수상은 록펠러센터 같은 시설이 개인의 소유라고 착각하는데 미국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법적인 대표는 개인이지만 소유주는 그 회사나 기관의 주주(株主)들이다. 예를 들면 체이스맨해튼은행도 록펠러가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록펠러는 주식 5%까지만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나머지 95%는 누구나 원하는 사람이 갖는다. 그 5% 수입에서도 세금이 있고, 록펠러가 갖는 것은 경영과 운영권이고 그 이윤으로 어떻게 사회에 도움을 주는가 하는 기여권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 학자는 학문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듯이 기업인은 기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메리카의 경제관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여 년 동안에 그 변천 과정이 불가피했다. 소유가 목적이라고 생각한 첫 단계가 자본주의였으나 그 단계는 끝난 지 오래다. 사회가 자본을 공유하는 단계로 바뀌었고, 지금은 기업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기여체제로 승화했다. 그런 경제체제의 변화 덕분에 미국 사람들은 흐루쇼프 수상의 공산주의 경제제도를 100년 이상 뒤떨어진 경제관으로 본다.   러시아 흐루쇼프 수상의 착각   무엇이 그 뒷받침을 했는가. 경제의 민주화 방법을 법제화시킨 것이다. 그 법치를 뒷받침한 정신은 기독교를 모체로 한 박애정신, 즉 휴머니즘이다. 인간애 정신이다. 그렇게 200년을 지난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열린 사회를 위한 다원주의,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아메리카 정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더 많은 생활가치를 창출해 사회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정신문화와 인간적 가치를 육성하는 데 이바지함이 오늘의 경제관이다. 자본주의가 끝난 것이 아니고, 그 인도주의적 정책이 세계적 경제정책으로 확장된 것이 지금의 시장경제의 원동력이면서 희망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도 1세기 동안은 그 역사적 지표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주장과 행태를 보면 역사적 후퇴일 뿐 아니라 지난 5년간의 경제파국을 연장하려 한다. 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서민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법인세 감면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정책을 강요한다. 그 결과는 중국과 같아졌다가 북한경제로 퇴락할 가능성까지 예상케 한다. 경제는 역사적 고찰과 사유가 없으면 단편적 이념에 빠지게 된다. 세계사적 안목과 인류의 공동가치를 찾아야 한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휴머니즘 자본주의 세계적 경제정책 공산주의 경제제도 경제적 혜택

2023-02-03

[김형석의 100년 산책] 도산이 건네는 새해 덕담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

나이 때문일까. 해가 바뀔 때마다 “어떤 덕담(德談)이라도”라는 부탁을 받는다. 선배 함석헌 선생은 “욕을 해도 깨닫지 못하면서 무슨 덕담이 필요해”라고 꾸짖기도 했다. 주로 정치인에게 던지는 충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나이만 들었지 그렇게 말할 자격도 없다. 그래도 “덕담이니까”라면 거절하기 힘들다.   그래서 새해를 맞을 때마다 들려오는 “송구영신(送舊迎新) 마음을 함께하자”는 뜻을 전한다. 옛것을 뒤로하고 새로움을 맞아들이자는 교훈이다. 덕담이지만 따져보면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누리지 못하면 희망과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경고이다. 지금 우리에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미국에 나란히 놓인 도산·간디 동상   여론조사기관에서 전화가 오는 때가 있다. “연세가 어떻게 되는가?”를 묻는다. 103세라고 대답할 수밖에. 그러면 바로 끊어버린다. 만일 여론조사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택해야 할 ‘제1호’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거짓과 진실’이라고 대답하겠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어려서 인도의 간디에게서 ‘정직’을 배웠고, 철들면서 도산 안창호에게서 거짓을 버려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간디와 도산의 애국심에서 우러나오는 호소였다. 미국 LA 부근 리버사이드시(市)에 가면 시청공원 한가운데 도산의 동상이 있고 그 뒤에 간디의 동상이 있다. 미국 백인사회에 왜 한국과 인도사람의 동상이었을까. 두 지도자는 평생을 ‘진실이 남고 거짓은 사라진다’는 진리를 믿고 살았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정직과 진실이 우리 국민의 최대 과제라고 믿는다. 해방을 맞고 2년 동안 공산 치하 북한에 머물면서 가장 심각했던 사회퇴락은 진실과 정직의 실종이었다. 진실은 버림받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정의까지 소멸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차례인 자유와 인간애까지 사라지게 되면 그 국가와 사회는 희망은 물론 생명력까지 상실하게 된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그랬고, 스탈린의 공산정권에서 물려받은 것이 바로 그 역사적 유훈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 상황도 비슷해지고 있다. 거짓과 불신에서 오는 국민 분열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는 도산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심지어 진실을 은폐하거나 거짓을 진실로 위장한다. 지도자 중에서도 허위와 거짓을 진실로 조작하는 일을 삼가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더 심각해졌다.   그 주동자들은 정권을 목적 삼는 정치인들이다. 지금도 그렇다. MBC의 ‘광우병 파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등단하면서 ‘수단과 방법만 잘 구사하면 승리할 수 있고, 그 승리가 곧 정의가 된다’는 개념이 상식이 되었다. 나와 우리의 거짓은 숨기고 상대방의 정직과 진실은 불의라고 투쟁한다. 거짓을 버리고 정직과 진실을 찾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왜 그런가. 거짓은 악(惡) 중의 악이지만 진실은 선(善)의 출발이며 사회질서와 가치의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엄연한 규범이 있다. 주어진 사실과 사건에서 진실을 찾고, 그 진실에 따라 가치판단을 내리라는 정론(定論)이다. 진실이 아닌 사실과 사건을 갖고 법적 논쟁과 윤리적 판단은 내릴 수 없다. 그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악을 배제하고 선을 택하는 일이다. 그것이 윤리와 도덕의 기본이다. 진실의 생활가치가 선이고, 거짓의 열매는 악의 씨앗이 된다.   선이란 무엇인가. 사회 공익성을 위하는 삶이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실효가치다. 악은 우리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을 훼손시키는 행위다. 자유도 있어야 하고 평등도 귀하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공익성에 위배되는 자유와 평등은 역기능의 주범이 된다. 소수인의 자유가 전체 국민의 불행을 초래해서는 안 되며 평등을 강요하는 정의는 인간성까지 병들게 한다. 이런 사회기능과 질서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정치인들이 인간의 행복을 찬탈했고 인류의 희망을 소멸시키고 있다.    진보·보수 모두 이념의 노예 상태   지금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현실이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악의 방향과 방법을 계속하고 있다. 진보로 자부하면서 폐쇄적 이념에 붙잡혀 있는 정치인들,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어 열린 미래로 가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이다.   이런 악을 버리고 선으로 가는 선별 기준은 무엇인가. 양심과 인격의 가치다. 선과 악은 개인의 인격과 양심 그리고 사회적 공익성에서 결정된다. 더 많은 사람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위해서다. 철학자 칸트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도 되는 행위를 너도 따르라”는 정론을 내렸다.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쉽게 가르쳐 준 것이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종교적 교훈이다. 인간애의 구현이다. 사랑은 공존의 가치와 질서이며 인간 완성의 희망과 이상이다.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거짓과 악을 버리고 진실과 선을 위하는 삶이다. 인간 사랑이 역사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핵전쟁을 감행하면 인류는 파멸한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 인간애의 절대가치는 믿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잘못된 선택이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거짓말 도산 도산 안창호 사회적 공익성 사회 공익성

2023-01-13

[김형석의 100년 산책] 14살 때 죽음 앞두고 올린 기도, 평생 지킨 ‘기도하는 삶’

친구였던 안병욱 교수의 얘기가 생각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아름다웠던 사제 관계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의 기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라는 책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마치 자기가 그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공감했다. 그래서 인류의 지혜와 교훈을 남겨 줄 수 있었다.   공자의 인품과 삶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성실(誠實)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자만큼 꾸밈없이 진실과 정직을 갖추고 산 사람이 없었을 것 같다. 그는 가난한 마음과 겸손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 정신의 그릇 속에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원천을 간직하고 살았다.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위해 평생 정진(精進)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그런 자아의 성실성이 인간관계에서는 인(仁)의 미덕을 탄생시켰다.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평생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스승 중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나도 그의 제자였다면 인생이 얼마나 풍부하고 행복했을까, 하는 자부심을 가졌을 것 같다.   “아침에 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아”   그러나 내가 공자를 누구보다도 존경하는 이유의 하나는 그가 자신 속에 잠재해 있는 ‘영원한 것’에의 그리움이다.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朝聞道 夕死可矣)고 고백하고 있다. 공자시대의 영원한 것은 ‘하늘의 도’였다. 종교적인 진리였다. 그 하늘의 정신적 실재가 인간화한 것이 인(仁)이었고, 인애(仁愛)를 간직한 사람이 성실한 삶을 찾아 누리게 되어 있다. 개인의 성실함이 인간관계의 어진 마음으로 진화하며, 그 어질다의 근원이 하늘과 우주의 진리라고 믿었다.   서양의 중세기는 기독교 세계관의 시대였다. 그 안에서도 ‘성실한 사람은 악마도 유혹하지 못하며 하느님도 그를 버리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그런데 공자는 그 도는 내가 찾아서 발견하거나 체험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초월하는 실재’가 있어야 할 것임을 암시해 준다. 그 도를 가르쳐 주는 정신적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세로 살았다.   철학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종교적 신앙의 문제는 윤리적 한계를 넘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성실함의 한계를 넘어 실재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사고와 지식보다 인륜적 삶의 가치를 포괄하면서 삶의 가치를 창출해 주는 더 높은 존재의 원천에서 주어진다는 논리다.   그것이 무엇인가. 철학의 동료들이 나에게 묻는 말이 그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도가 어떻게 종교적 신앙을 먼저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이미 철학의 탐구적 본분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다. 우리 세대의 선배였던 박종홍 교수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나는 철학적 진리의 여신 옷자락을 찾아 붙들고 눈물을 흘릴 수는 있어도 종교적 신앙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제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신앙이 선행하면 진리의 여신은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성실성은 종교 신앙과 공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때는 세계 휴머니스트협회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그 회원들 속에는 유신론자가 없었다. 종교적 신앙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도가 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무신론 철학자의 저서도 읽었고 종교적 신앙이 없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그 결과는 내 종교적 신앙심을 더 승화시켜 주었을 뿐이다.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성실성의 선물이나 결실이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성실성 플러스 경건성이었다.   경건성은 우리가 모두 지니고 있는 성실함을 한 단계 더 높여준다. 반(反) 비(非)성실함이 아니고, 성실을 내포하는 초(超)성실이다. 나에게 그런 신념을 갖게 해 준 철학자는 칸트였다. 그의 종교철학 제목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다. 종교는 초이성적인 영역의 실재임을 암시해준다. 나는 칸트를 경건성을 지닌 철학자라고 느꼈다. ‘요청적 유신론’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 경건성이 무엇인가. 나에게는 ‘기도하는 마음’이다. 내 인생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성실성을 갖춘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공자의 고백이 바로 그런 뜻이었다. 도를 깨닫기 위해, 성실과 어진 마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편에 기도에 관한 얘기가 있다. 공자가 신병으로 고통을 겪을 때 자로(子路)가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얘기를 들은 공자가 내 건강을 위한 미신적인 기도는 원치 않으나 잘못을 뉘우치고 선을 실천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구한다는 뜻의 기도는 항상 드려왔다고 했다.   철학자 박종홍·김태길 교수의 귀의   공자에게만이 아니다. 친구인 김태길 교수도 기도드리는 말년을 지냈다. 박종홍 교수가 신앙인이 되고, 장례예배가 새문안장로교회에서 열린다는 신문 기사를 본 배종호 교수가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들려준 병중의 사연과 신앙적 회심을 전해 들은 배 교수가 남긴 말이다. “그래, 박 교수도 갈 곳이 없었겠지”라고 했다.   그렇다. 종교적 신앙은 그런 체험에 뒤따르는 인생의 승화된 삶이다. 나는 14살 때 삶의 종말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께서 저에게도 어른이 될 때까지 살도록 건강을 허락해 주시면, 제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는 기도였다. 기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 것이 신앙적 체험이라고 믿는다. 철학의 진리는 선한 인생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내 삶의 목표와 인간의 영구한 희망을 남겨 주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기도 죽음 종교적 신앙심 종교 신앙 성실성 플러스

202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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